식량 안보와 곡물 공급망 전쟁
우리는 흔히 곡물을 단순한 식량, 즉 먹거리로만 인식하지만, 최근 글로벌 경제 흐름에서는 곡물이 더 이상 단순한 농산물이 아닙니다. 곡물은 산업, 에너지, 정치, 외교의 핵심 자원이자 무기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가뭄, 홍수, 산불 등 기후재난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무역갈등, 중동 분쟁 등이 겹치면서 글로벌 곡물 공급망은 심각한 불안정 상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 확보는 개인의 생존을 넘어서, 국가의 안보와 경제적 주권을 결정짓는 이슈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식량 안보의 개념과 곡물의 희소성, 그리고 세계 주요국들이 펼치고 있는 곡물 자원전쟁의 실체,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곡물도 전략 자원입니다 – 식량의 희소성과 자원화
곡물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 자원이지만, 현재는 지정학적·경제적 희소성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 전략 자원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수요는 증가하고 있지만 공급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수요 측면에서는 인구 증가, 육류 소비 확대, 바이오에너지 산업 성장 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옥수수는 사료뿐 아니라 바이오에탄올로도 사용되며, 에너지와 식량이 경쟁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 곡물 소비는 매년 증가 추세에 있으며, 특히 개발도상국의 중산층 확대는 곡물 수요를 더욱 자극하고 있습니다.
반면 공급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영향으로 주요 곡창지대에 이상고온,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가 잦아지며 작황 부진이 반복되고 있고, 전쟁과 정세 불안으로 주요 수출국의 공급 능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밀 수출의 약 10%를 차지하던 국가였지만, 전쟁 이후 생산과 수출 모두 급감했습니다. 이는 곧바로 세계 식량 가격 급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국제 밀 가격은 2022년 한때 80% 이상 폭등했고, 일부 국가는 수출을 제한하면서 시장이 더욱 불안정해졌습니다. 이제 곡물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국가의 전략 자산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자원 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입니다.
세계는 지금 곡물 확보 전쟁 중 – 자국 우선주의와 수출 제한
세계 각국은 자국의 식량 안보를 위해 보호주의적인 곡물 정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곡물 수출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인도와 러시아의 밀 수출 제한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인도는 2023년, 자국 내 식량 물가 상승을 이유로 쌀 수출을 전면 중단한 바 있습니다. 이는 아시아, 아프리카 등 많은 개발도상국의 식량 위기로 직결되었습니다. 또 다른 곡물 강국인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곡물 수출을 무기화하며 전략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국 우선주의는 단기적으로는 물가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글로벌 식량 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곡물 패권 경쟁
미국은 세계 최대의 옥수수, 대두 수출국으로, 자국의 농업 보조금 정책을 통해 곡물 가격과 공급을 글로벌 시장에 직간접적으로 조정합니다. 중국은 최근 대두, 옥수수, 밀 등 전략 곡물 비축량을 사상 최대 수준으로 확대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대량 매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는 곡물 가격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며, 중소 수입국은 물량 확보 경쟁에서 밀려나기 쉽습니다.
결국 곡물도 ‘자원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로 나뉘고, 식량 확보는 에너지 확보 못지않게 국가 전략 차원의 사활적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식량안보 전략 – 자급률 개선과 해외 농업 투자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곡물 자급률은 20%대, 그 중 밀 자급률은 1%도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국제 가격 변동이나 수출 제한 조치에 매우 취약합니다. 실제로 2022년 밀 가격 급등 시, 한국의 제빵업계와 식품 기업들은 원가 부담에 크게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한국은 중장기적인 식량 안보 전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밀 자급률 제고와 국내 생산 확대
정부는 2025년까지 밀 자급률을 5% 이상으로 확대하기 위해 밀 재배면적 확대, 국산 밀 품종 개발, 생산농가 지원 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비자에게 국산 밀을 더 친숙하게 만들기 위한 공공 급식 중심의 소비 확대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은 최근 기후 변화에 강한 내병성 밀 품종 개발에 성공했으며, 이는 향후 국내 생산 확대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해외 농업 개발과 곡물 수입 다변화
한국은 곡물 수입 구조의 다변화와 해외 식량 기지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해외농업기술개발센터를 통한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농업기지 운영입니다. 또 한때 중단됐던 해외 농업개발 프로젝트도 최근 재개되어,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러시아 극동 지역 등에 한국 기업이 진출해 직접 곡물을 재배하고 확보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곡물 비축량 확대, 국제 곡물 거래소와의 협력 강화, 해상 물류 확보 등 식량 수급 전반에 걸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종합적인 전략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식량은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곡물이 글로벌 경제의 핵심 자산이자 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자원화된 식량의 가치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식량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곡물 확보와 공급망 안정성이 그 어떤 산업 전략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단기적인 물가 안정뿐 아니라, 장기적인 국가 생존을 위한 투자로서 식량 안보 전략을 인식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제는 식량이 무기화되는 시대입니다. 식량 자립 없이 진정한 경제 독립은 불가능하며, 곡물 자원 확보를 둘러싼 글로벌 경쟁에서 한국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 할 방향은 분명합니다.